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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학

커피의 역사 - 커피 음용의 전설

by 커피투성이 2022. 11. 4.

2. 커피 음용의 전설

 앞부분에서 서술하였듯이 커피 음용의 기원에 이슬람교가 깊이 관여하고 있지만, 이들 아라비아어 사진 책의 번역을 한 유럽학자들은 커피 음용에 관여된 이슬람교를 그 일파의 수피즘의 전도승일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슬람교는 신자의 약 90%를 차지하는 전통 승리파와 이란을 중심으로 하는 시아파로 크게 구별되었지만, 수피즘은 8세기 말에서 9세기에 걸쳐서 번성하고, 11세기 중반에 체계화되었다. 그 원리는 코란에 대한 심사 명상, 즉 예배에 의해 자신을 엄격하게 신에게 접근시키고 신과의 융합을 바라는 것으로 세상의 욕망을 버리고 빈곤과 금욕의 생활을 지킨다. 따라서 수피에서 행하는 심야의 기도에 커피가 유효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일단 승리 파에 속하지만 '시에이크' 라고 불리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하는 수피의 교단 활동에 있어서 수피즘은 종파를 넘어서 이슬람 세계에 넓혀졌다. 커피의 시원에서 언급한 두 가지의 전설에 나오는 이슬람 신자는 그 언동에서부터 수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점에 관해서 최근 臼井隆一郞는 그 저서 중에서 커피를 보급하게 시킨 것은 아프리카에서 인도를 거쳐 큰 조직을 가진 수피즘의 샤지리아 교단으로서 그들이 14세기에 아비시니아에서 음용되고 있던 커피를 대용하고, 그 수피들이 각지의 모스크를 돌아 포교할 때 그 예식의 일부로써 커피 음용을 권장하였기 때문에 짧은 시기에 커피 음용이 이슬람 세계로 전파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커피의 어원으로서 에티오피아 남서부의 커피 생산지대인 카파에서 유래한다고 하는 설도 있지만 보통은 다음 설이 유력하다. 커피를 가리키는 아라비아어의 '카와'는 본래 와인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카트, 커피 등 흥분이나 흥분 작용을 나타내는 음료도 '카와'라 불렸다. 그 사이에 와인과 카트가 사라지고 '커피' 이름이 정착되었다. 이것이 바로 커피가 알코올 음료를 금지했던 코란의 가르침에 반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의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앞에 소개한 아라비아어의 사진 책도 수피즘의 입장에서 커피 음용에 대한 당위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caffe Florian 1720
caffe Florian 1720

 

 이렇게 해서 이슬람 세계에서의 정당성을 획득한 커피는 1475년 메카에, 1510년 카이로에 넓혀졌다. 1299년 소아시아의 오스만터키는 소아시아를 정복하면서 1361년 발칸에 진출해서 그리스, 불가리아, 루마니아를 점령, 1353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켜 동로마제국은 멸망했다. 술탄 왕조의 세리므 1세는 이집트를 정복하여 같은 해에 커피가 이스탄불에 전해졌다. 예멘이 터키의 지배하에 들어온 것은 1536년이지만 터키어로 카베라고 불린 커피는 16세기 말에는 터키 지배 하의 발칸제국에도 넓혀져 헝가리에서는 ‘Kave’라 불렸다.

 로마에는 1602년에, 베네치아에는 1615년에 전해져 'Caffe'라 불렸고, 1645년에는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광장에 커피점이 오픈되었다. 1616년에는 네덜란드에, 1641년에는 영국에, 1644년에는 마르세유에, 1657년에는 파리로 전해져 'Cafe’라 불렸다. 1650년에 옥스퍼드에서, 1652년에는 런던에서, 1659년에 파리에서 각각 커피하우스가 오픈되었다. 1670년에 독일에, 1674년에는 스웨덴에 전해졌고 1675년에는 함부르크에 커피하우스가 오픈되었다. 1683년 오스만터키에 의한 제2차 빈 포위가 실패했을 때, 유출되었던 커피 생콩을 사용하여 같은 해 빈에서 커피하우스가 오픈되었다. 북미에는 이민에 의해 1668년에 전해져 1696년에는 뉴욕에서 커피하우스가 오픈되었다. 이렇게 하여 커피는 베네치아에 상륙 후 종교상의 제약이 없었던 유럽에서는 건강상의 피해나 정치적 혹은 경제적인 제약을 넘어서 100년 사이에 전 유럽으로 확산하였다. 또한 그때까지 사람들은 배전 콩의 분말을 넣은 이브리크식의 터키 커피를 마시고 있었지만, 1711년 프랑스에서 플란넬 드립이 고안되어 처음 투명한 커피를 즐기게 되었다. 영국에서는 1715년에 런던의 커피하우스가 2000(8000점이라고도 한다.)에 달할 만큼 커피를 선호하였지만, 18세기 중반경부터 홍차를 음용하게 되어 해외 영국 식민지도 이것을 선호하였다. 당시 유럽 전쟁에서 지출되는 전쟁 비용에 고심한 영국 정부는 1767년 차의 수입에 심한 벌금을 부여하도록 하여 이것을 해외 식민지에도 적용하였다. 이것에 반발한 아메리카인은 1773년 보스턴 항에서 차를 운반한 배를 습격하여 차를 바다에 던져버렸다고 하는 티 파티 사건을 일으키고, 이것을 기점으로 미국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아메리카인은 홍차에서 커피 음용으로 바뀌었다.

 일본에서는 1690년경 나가사키 섬의 네덜란드 상점을 방문한 소수의 사람들이 마신 것이 최초로 알려져, 1781~1788 나가사키에서 출판된 홍모본초(KIEX)에 처음으로 기재되어 있다. 초기에는 커피 소비가 느리게 증가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미 전통적인 녹차를 마시고 있었던 것과 일본의 식문화에 커피 풍미가 익숙하지 않았던 것, 그리고 국민소득이 낮았던 것 등을 들 수 있으며 커피 음용은 일부 상류계층이나 레스토랑 음식점 등 특정 장소에 한정되었다. 나중에 식문화의 다양화와 국민소득의 증대에 따라 수입량은 급속하게 증가하였고, 明治 45년에는 8만톤을 넘어, 明治 48년에는 13만톤, 1990년에는 29만톤 이상에 달했다.

 우리나라에는 언제 커피가 들어왔는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조선 말엽, 아관파천 때에 고종황제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면서 커피를 마셨다는 기록이 있으며, 후에 정관다현이라는 다실을 만들어 커피를 즐겼다고 한다. 이후 일본 강점기에 접어들면서 다방 문화가 나타났는데, 시인 이상은 다방 69에 얽힌 일화와학 등 다방을 경영한 것으로 유명하다. 6.25 후에는 미국과 일본의 커피문화가 들어와 어느 정도의 레귤러 커피문화가 형성되었으나, 경제적문화적 사정에 의해 퇴조하고 인스턴트커피가 크게 자리 잡았다. 1990년 전후하여 경제적문화적 발전과 함께 비로소 레귤러커피 문화가 새롭게 발전하기 시작하더니 21세기로 들어오면서 에스프레소 문화가 크게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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