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커피학

커피의 역사 - 커피 재배의 확대 (1)

by 커피투성이 2022. 11. 4.

3. 커피 재배의 확대

 커피 음용이 시작된 초기는 그 소비량도 적었기 때문에 예멘 서부 산지의 서쪽 경사면이나 아비시니아고원에 자생하는 커피나무에서 채집한 과실에 의존했다고 보인다. 그러나 커피 음용이 이슬람 세계에 확대되면서 그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서 예멘이나 에티오피아 남부의 카파지방에서 적극적인 재배가 진행되고 이들은 예멘에 모여서 일부는 육로로 대부분은 홍해 항로를 따라 각지로 운반되었다.

coffeebean
coffeebean

 

 당시의 생산과 유통량에 대해서 臼井隆一郞에 의하면 16세기에 예멘의 생콩 생산량은 최대 1만톤 정도 이었을 것으로 예상한다. 그리고 17세기 중반에 모카에서의 수출량은 약 4800 톤이기 때문에 모카, 아덴 등의 수출 물량을 더하면 총 수출량은 그 2~3배로 된다. 17세기에 들어와 유럽에서의 수요가 증가하여 처음은 카이로나 레반토 지방에서 수입하고 있었지만, 1616년 네덜란드가 처음으로 모카항으로부터 직접 암스테르담으로 운반하고 1663년부터는 정기적으로 수입하였다.

 영국, 프랑스 등의 동인도 회사도 1660년경부터 경쟁하여 모카, 아덴 등에서 직접 생콩을 사 들여 본국으로 수송하였다. 예를 들어 1715년 프랑스는 1115톤의 생콩을 수입하였다. 당시 터키 정부는 자국 영내의 커피 소비를 확보하기 위해서 예멘산의 생콩의 약 절반인 2500톤 확보를 명령하고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 수출을 인정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 때문에 예멘 으로부터 수출된 생콩의 가격은 급등하게 되었다.

 

 

 16~18세기에 결쳐 계속된 유럽 제국 사이의 전쟁에 연이어 서인도제국, 중남미, 아프리카, 인도, 동남아시아 등에서 식민지전쟁이 연발하고 각국은 식민지를 둘러싼 심한 전쟁과 함께 획득한 식민지에서 이윤이 많은 농산물을 재배하였다. 그들 가운데에서 최고로 성공한 것이 사탕수수이고, 아프리카로부터 수입된 다수의 흑인 노예를 이용하여 제조한 설탕을 유럽에 수출하여 막대한 이익을 남겼다.

 

 예전부터 커피의 수익성에 주목하고 있던 네덜란드는 1616년에 재빨리 모카에서 커피나무 한 그루를 본국으로 가져갔지만 재배에는 실패하였다. 당시 유럽에서는 어떤 지역의 작물이 같은 위도에 있으면 지구상 다른 지역에서도 재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1658년 네덜란드는 포르투갈로부터 빼앗은 실론에 모카로부터 커피나무를 옮겨 재배해서 성공했다.

 한편 1595년에 자바에 진출한 네덜란드는 1602년에 동인도회사를 설립, 바타비아에 근거를 두고 지배 지역을 확보하였다. '드칸돌'에 의하면 동인도회사의 지배인으로부터 아라비아의 커피나무를 도입하도록 권고 받은 바타비아 충독은 1696년 인도 서해안의 마이소올 부근에서 커피나무를 바타비아에 이식했지만, 다음 해 홍수로 실패했다. 1699년 다시 마이소홀에서 나무를 옮겨 이번에는 재배에 성공하였고, 1706년에는 그 여러 나무를 본국으로 옮겼다. 자바에서 커피 재배는 순조롭게 발전하여 1712년에는 처음으로 405kg의 생공을 암스테르담에 보냈다. 그 후 생산은 급속하게 증가하여 수출량도 1727년에는 680, 1855년에는 77000톤에 이르렀다. Wrigley에 의하면 생콩을 모아서 바타비아를 출발한 네덜란드 배는 중도에 아덴을 거쳐 현지의 커피 거래 가격을 조사하고 나서, 본국으로 돌아와 예멘 콩보다 낮은 가격으로 판매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네덜란드는 유럽에 대한 커피시장을 지배하게 되었다.

 

 앞에 서술하였듯이 영국에서는 1714년에 런던에 수많은 커피하우스가 생길만큼 커피를 선 호했지만, 1739년에는 그 수는 551개소로 감소되었고, 대신에 클럽이 개설되어 특정 사람들 이 이 클럽에서 커피를 마셨다. 이 커피하우스가 감소한 이유 중 하나로써 보험업, 신문 발행, 주식 증권업의 개설 등 커피 하우스가 이룩한 근대 시민사회 형성을 위한 중간 역할이 끝난 것임을 생각할 수 있다. 또 음료용이 일반 가정에서도 보통 마실 수 있는 것이라든가 커피 무역에서 네덜란드가 주도권을 잡고 있는 것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

 

 네덜란드에 의한 자바 커피의 수출이 증가한 1740년 이후 커피 취급량은 감소하고 대신에 중국 무역에 있어서 압도적인 강세를 이용한 중국차의 수입이 증가하여 1886년에는 최고 4만톤에 이르렀다. 1706년 자바로부터 커피나무를 받아 네덜란드는 이것을 암스테르담 식물원의 실온에서 키워 열매를 맺어 증식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1714년 열매를 잘 맺은 몇 그루의 커피나무가 프랑스 루이 14세에 전달되어 베르사이유의 마르리온실, 파리의 왕실식물원의 온실에 옮겨져 증식되었다. 네덜란드는 스페인으로부터 빼앗은 남미 수리남(네덜란드명 기아나)1718년 암스테르담으로부터 커피나무를 보내 재배를 시작했다. 1725년 근처의 프랑스령 기아나의 카엔누에 있던 프랑스 충독은 수리남으로부터 몇 그루의 커피나무를 몰래 입수해서 재배를 시작하였는데, 1727년에는 그것이 비밀리에 아마존 하구 지대의 브라질령의 파라에 가지고 나가 재배되었다. 파라에서의 재배는 성공하여 1732년에는 커피 생콩을 수출하기에 이르렀다.

 

 1708년 프랑스의 동인도회사는 모카로부터 인도양상의 버번섬으로 이식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고 1715년에 다시 이식하여 성공하였다. 이 섬의 커피나무에서 유명한 버번종이 탄생하였다. 또 프랑스 정부는 1715년 파리식물원에서 자란 나무를 서인도제도의 아이티나 산토도밍고에 이식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중에 노르망디 출신으로서 마르티니크섬에 농원을 가진 프랑스의 해병대사관 가브리엘 드 크루에 의해 1723년에 성공하였다. 이 가브리엘 드 크루의 모험은 Wrigley 저서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계속)

 

댓글